나만의 개강 그저 사는 이야기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학교는 휴학 상태이고, 고시공부도 하고 있지만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시 한번 마음공부의 시즌이 돌아왔다.

어떤 단어가 자신을 위해, 더 나아가 지금 나의 상황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기분을 느낀 적 없는가? 지금 '번뇌'라는 단어가 나를 위한 맞춤상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딱히 큰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일상, 그 안의 작다면 작은 일들이 나의 번뇌를 낳는다. 예전에 A양은 나를 보고 예민한 사람이라 평했다. I can't agree more.

과민함이 나를 좀먹는다. 요즘 스스로의 모습을 보자면 사람의 약함과 그것이 유발하는 내적 왜곡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문제점을 (비록 심각한 정도나 형태로 발현되고 있지는 않다고 믿고 있지만) 다양하게 체득하고 있다.

과거에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잘 와닿지는 않던 정신분석에 대한 글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사회의 loser로서 불특정다수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사회에 대한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이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공감(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범죄자의 모습에서 나의 편린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인성의 왜곡과 그것을 범죄로 해소(혹은 발현)하는 모습에서 나의 뒤틀림이 더 발전하면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스로도 조금은 무서웠다.

사람은 나이를 먹고, 힘든 일을 겪을 수록 내적인 짐을 지고 살게 된다. 그 짐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단순히 참는 것을 비롯하여, 취미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병인(病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혹은 사회로부터 도망쳐 은둔하기도 한다. 범죄자가 되기도 하고 종교인이 되기도 한다.

(도덕적인 것을 차치한다면) 마음의 짐을 덜고, 안정을 되찾는 가장 이상적인 길은 병인을 제거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싸운 사람이 있으면 화해해야 하고, 화해하지 못하면 도망가거나 그 사람을 없애야 한다. 마냥 도망가거나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살인을 자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 가능성의 측면에서도 말이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내가 모든 일을 해결할 만큼 유능한 것도 아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불교의 명제가 문득 떠오른다.

왜곡이라는 단어의 통상적인 용례는 아니겠으나, 모두들 자신의 내부를 왜곡시켜서 고통으로부터 도망친다. 고통스러운 원인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려고 하는 대신 별 것 아닌 일이라고 치부하여 심리적으로 도망친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외면하기도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고, 병인의 제거가 아닌 다른 행위로서 고통을 더는 일이 병인의 제거보다 오히려 빈번하다.

외면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뉘앙스와는 달리, 그 외면이라는 개념에는 종교적 깨달음도 포함시키고 싶다.(여기서의 종교적 깨달음이란 비단 체계화된 종교활동을 통한 것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명상 들을 통해 이룩한 정신적 경지도 포함한다.) 불교적 해탈은 어쩌면 삶에 존재하는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정도의 외면은 엄청난 정신적 수양을 이룩한 경지, 내가 위에서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주 극한의 단계에 이른 '고도의 왜곡'이 필요할 뿐이다. 그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으면 그 순간 굉장한 쾌감이 밀려온다고 한다. 나는  범죄자(싸이코패스를 포함하여 심리적, 정신적인 이유로 범죄를 행하는 범죄자들을 말한다.)들이 범죄를 저지르면서 느끼는 그 쾌감과 이 종교적 각성상태를 결부시키고 싶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불경한 생각일 수 있겠으나 그 본질은 무서울 정도로 유사하다. 평소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현실적인 고통으로부터의 전면적 해방. 일반적으로 종교적 각성의 경우에는 그 깨달음으로 인해 장기적인, 때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지속시킬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큰 차이는 있지만, 그 역시도 절대적인 차이는 아니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의 책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보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나 하루만에 그 깨달음이 깨져버리는 경험을 담은 글이 실려 있다. 종교적 해탈(물론 일시적이라면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역시 일시적인 해방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종교적(혹은 정신적) 깨달음을 얻은 이들을 깎아내려는 의도는 없다. 위대한 스승들이 범죄자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들의 깨달음을 많은 이들이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서로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소위 마음공부라는 것에 몰입하는 나의 입장에서, 개인적인 평화만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범죄라는 (어찌 보면 손쉬운) 길이 높은 수준의 정신적 깨달음만큼이나 '유용'하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사회가 힘들어질 수록 우리(고통에서의 탈출에 집착하는 이들)는 고통의 수렁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절박하게 헤매고 다닐 것이다. 옛 수행자들도 종종 사도(邪道)에 빠지곤 했다. 혼자 산에 들어가 수양하던 사람이 괴인이 되어 사람을 해치고 다니는 옛날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나는 그것들이 역사적 사실에서 많이 벗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그 이전에 내가 현대판 사도를 걷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는 것은 기우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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